1940년대, 이름도 얼굴도 잊힌 소녀들이 전장으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어린 나이에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조차 짓밟혔고, 해방 후에도 이들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하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증언은 단순한 피해 기록이 아닙니다. 전쟁과 인권, 여성의 역사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증거이며,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목소리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끌려간 과정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대부분 13세에서 20세 사이의 소녀들이었습니다. 강제로 연행되거나, 거짓된 취업 약속에 속아 전장으로 끌려갔습니다. 1944년 당시 15세였던 이용수 할머니는 대구에서 친구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속아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에 따라나섰다가 결국 중국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녀는 증언에서 "총 끝으로 협박당했다.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약 20만 명 이상의 여성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1992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법 제3조는 피해자에게 의료비, 생활지원금 등을 제공하며, 피해자 등록 및 보호를 위한 구체적 조항을 명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연행이 아닌,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전시 성폭력 동원 체계라는 점입니다.
위안소에서 겪은 고통과 참혹한 현실
피해자들의 증언은 인간의 언어로 다 담기 어려울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전합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고, 거절하면 폭행과 감금이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위안소의 생활은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학대를 동반했고, 의료조치도 거의 없이 병에 걸리거나 임신해도 강제로 낙태당했습니다. 심지어 위생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한 증언자는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벽에는 피와 곰팡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위안소는 단순한 성 착취 공간이 아니라, 국가가 조직한 범죄의 무대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UN 인권위원회는 1996년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된 성 노예 제도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에 법적 책임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침묵을 깨고 외친 생존자들의 증언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언론 앞에 나섰을 때 세상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국 사회가 오랜 시간 외면해왔던 위안부 피해의 진실이 그녀의 증언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용기 냈다”고 말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생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와 법적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인권 시위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복동 할머니는 “죽기 전까지 이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하며, 전 세계 유엔회의, 국제인권포럼에 참석해 일본의 만행을 고발했습니다. 이러한 증언과 행동은 단순한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 인류 보편의 역사 기록이 되었습니다.
국제사회와 국내의 책임 있는 움직임
현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 인권 이슈로 확산되었습니다. 2007년, 미국 하원은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캐나다·EU 등 여러 국가에서도 이를 지지했습니다. 한국 정부 또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에도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선언하며,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 중입니다. 2021년에는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매년 8월 14일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교육하는 날로 삼고 있습니다. 교육부의 역사교육 지침에도 위안부 문제는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초·중·고 교과서에는 실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용기와 삶을 존중하고 역사를 바로 기록하고 전승하는 노력입니다.
결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인권의 가치, 전쟁의 비극, 국가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묻는 살아 있는 기록입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에서부터, 수십 년간 이어진 수요집회, 국제사회의 응답까지.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용기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움직인 변화의 불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기억하고, 알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합니다. 침묵은 다시금 피해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 더 민감해지고,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정의로운 역사 회복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잊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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