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친일의 대명사 그들의 최후는?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제로 박탈된 을사늑약은 민족 자존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치욕스러운 조약에는 일본의 강압만이 아닌, 조선을 팔아넘긴 자들이 있었습니다.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친일파—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은 일제에 협력하며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결국 역사에 가장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그들의 행적과 최후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분노와 한탄을 불러일으키며, 친일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을사오적의 정체와 행적
을사오적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찬성한 다섯 명의 고위 관료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내각의 핵심이었으며, 조약에 찬성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넘기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완용은 당시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조약 체결의 중심 인물이었고, 박제순은 외부대신으로 실무를 맡았습니다.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역시 고위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이완용은 후일 한일병합조약까지 찬성해 ‘국적을 팔아먹은 자’로 비난받았고, 민중들은 이들을 '오적'이라 지칭하며 전국 곳곳에 '오적암살단'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민심은 “나라를 판 자는 반드시 벌받는다”는 신념에 가까웠고, 1906년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며 이들을 "만고역신"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완용의 최후와 평가
이완용은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두 사건 모두에 깊이 관여한 대표적 친일 인물입니다. 그는 권력을 위해 민족의 자주권을 넘겼고, 이후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거액의 은사금을 수령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1909년 12월,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의 연쇄적 테러 시도 이후 이완용도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실제로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에게 칼에 찔려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경호원을 대동하며 은둔생활을 했으며,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민중들의 증오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일제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작위와 훈장을 줬지만,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공식 등재했습니다. 이는 그가 역사적으로 ‘국권 침탈의 대명사’로 평가받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박제순과 권중현의 몰락
박제순은 을사늑약 당시 외부대신으로서 실질적인 외교 문서 작성과 협상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와 긴밀히 협조했으며, 조약 체결 직후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대가로 그들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박제순의 가족은 그 이후 내내 사회적 냉대를 받았고, 그의 후손들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자신들의 조상을 숨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권중현 역시 농상공부 대신으로 조약 체결에 찬성했고, 이후 일본 귀족원 의원까지 역임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에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그들의 이름은 ‘반민족 행위자’라는 오명과 함께 불리게 되었고,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1조에 따라 역사적으로 규탄 대상이 되었습니다. 짧은 권력욕을 위해 조국을 판 이들의 말로는 결국 ‘역사의 죄인’이었습니다.
을사오적의 역사적 단죄와 기억
을사오적은 조선 말기 권력 중심에 있었던 고위 관료들이었지만, 그들의 선택은 조국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이들에게 작위를 부여하고 포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끊임없이 이들을 심판하려 했습니다. 이근택은 의병 세력에게 납치될 뻔한 위기를 겪었으며, 이지용은 암살 기도를 수차례 받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살아서도 민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고, 사후에도 묘소가 파헤쳐지거나 후손들이 조상의 이름을 감추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을사오적의 반민족 행위를 공식 조사하였고, 그 기록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최후는 명확히 말합니다. 어떤 권력도 민족을 배신한 대가는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을.
결론
을사오적은 단순한 역사 속 인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민족을 배신한 자’의 대명사로 회자되며, 친일의 뿌리 깊은 상처를 상기시키는 존재입니다. 대한민국은 20세기 초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배신으로 고통을 겪었고, 그 중심에는 이완용을 비롯한 오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최후는 곧 ‘역사적 단죄’의 본보기이며, 아무리 권력과 부를 손에 넣더라도 민족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과거를 되짚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의 자유와 주권은 수많은 희생과 피의 결과이며, 그 대척점에 선 자들의 말로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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